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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7월 18일 사적으로 지정되었으며, 충주시에서 관리하고 있다.

면적은 80,454㎡이며, 하늘재 계립재   새재에 둘러싸인 험준한 산골짜기 북쪽 기슭에 북향 하여 있다.

창건 연대나 내력은 물론 사원의 정확한 명칭도 알 수 없으나, 고려 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짐작된다.길이 9.8m, 너비 10.75m, 높이 6m의 인공으로 쌓은 석굴식법당의 중앙에 대좌를 두어 석불입상을 봉안하고, 측면과 후면 석벽 중앙은 감실처럼 만들어 작은 불상들을 부조하여 장식하였다.

상부에는 목조건물을 지어 천장을 만들었던 것으로 짐작되며, 이는 토함산 석굴암의 양식을 계승한, 고려시대의 유일한 석조·목조 구조의 반축 조석 굴 사원으로 평가되고 있다.

절터 안에는 충주 미륵리 석조 여래입상 삼층석탑, 석등, 귀부 , 당간지주, 불상대좌 등의 석조 유물이 있다.

이들 유물의 조형 수법으로 보아 고려 초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북쪽으로 지형이 낮아짐에 따라 계단식으로 대지를 조성하여 사원을 형성하고 있다.

1977년부터 연차적으로 발굴조사가 실시되어 사원의 옛 모습이 밝혀지고 있다.

‘미륵당초라 새겨진 기와 연꽃무늬 막새기와, 금동제 귀면 등이 출토되었다.

충청북도 충주시 수안보면에 있는 고려전기 석굴을 주불 전으로 하는 사찰터. 사적. 키워드 미륵불 석굴사원 충주 미륵리 석조여래입상 충주 미륵리 오층 석탑 개설 1987년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하늘재·계립재 새재에 둘러싸인 험준한 산골짜기 북쪽 기슭에 북향 하여 조성된 석굴을 주불 전으로 하는 절터이다. 창건 연대나 내력, 사원의 정확한 명칭을 알 수 없으나, 고려 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짐작된다.

석굴은 거대한 돌을 쌓은 위로 목조로 세운 자취가 있으나 지금은 남아있지 않다.

발굴 당시 ‘미륵 당초’라고 새겨진 기와가 나와, 통일신라 후기에서 고려 전기의 사원으로 추정된다.

현재, 충주 미륵리 석조여래입상( 충주 미륵리 오층 석탑, 석등, 당간지주 등 중요한 석조 문화재들이 남아있다.

전설에 의하면 신라 경순왕의 아들 마의태자가 나라가 망한 것을 슬퍼하며 금강산으로 가는 도중, 누이인 덕주공주가 월악산에 덕주사를 지어 남쪽을 바라보는 마애불을 만들자 태자는 북향의 석굴을 지어 덕주사를 바라보게 하였다고 한다.

역사적 변천 1977년 1차 발굴조사 당시, 명창 삼 년 김당 개개와 미륵당 미륵 당사 원주 등의 명문가 출토되어 미륵을 모시는 사찰이자 원을 겸하는 사찰이며, 1192년 고려 명종 22 금당의 기와를 새로 이었음을 알 수 있다.

아울러 석굴과 전실의 목구조가 소실된 것은 13세기이며, 이후 곧 복원되었고 조선 초기에 크게 수리되었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다시 소실되었고 18세기에 들어 수리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언제 폐사되었는지 확실하지 않으나 1936년 발생한 큰 수해로 법등(法燈)이 끊어진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2011년 7월 28일 자로 ‘중원 미륵리 사지’에서 ‘충주 미륵대원지’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내용 해발 378m의 고지대에 위치한 미륵대원지에는 길이 9.8m, 너비 10.75m, 높이 6m의 인공으로 쌓은 석굴 형식의 불전이 있다.

석굴 중앙에는 대좌를 두어 석불입상을 봉안하고, 측면과 후면 석벽의 중앙은 감실처럼 만들어 작은 불상들이 부조되었다.

석굴 상부는 목조 건물로 지어 천장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현재 절터에는 충주 미륵리 석조여래입상, 충주 미륵리 오층 석탑, 삼층석탑, 석등, 귀부 당간지주, 불상대좌 등의 석조 문화재가 있다.

양식적으로 보면 고려 초인 10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지형이 북쪽으로 갈수록 낮아져 사원은 북향을 하고 있으며, 사원 전체가 계단식으로 조성되어 있다.

1977·1978·1982년 3차례에 걸쳐 시행된 발굴조사 당시 출토된 여러 명문 기와와 건물지 발굴을 통해 사찰의 성격이 밝혀졌다.

특히 미륵대원’이라고 한 것은 동쪽에 역원이 있었기 때문인데, 말을 묶어 둔 마방시설, 여행자 숙소 등 역원의 건물터도 함께 발굴되어 사찰과 역원의 기능을 합친 고려 초기의 중요 유적지로 평가되고 있다.

미륵대원지는  왕력의 아달라니질금 조에 “계립령 금 미륵 대원 동령 시야의 미륵대원으로 추정된다. 미륵대원의 존폐 시기는 분명하지 않으나 일연이 삼국유사를 저술한 시기인 고려 충렬 왕대까지는 존속되고 있었던 듯하다.

특징 국내에서 유일하게 북쪽을 바라보는 특이한 구조를 가진 절터이자, 석조와 목구조를 결합한 석굴을 금당으로 삼은 유일한 유적이다. 의의와 평가 토함산 석굴암의 양식을 계승한 고려시대의 유일한 석조·목조 구조의 반축 조석 굴 사원으로 평가된다.

석조여래입상이 북쪽을 바라보는 절터에 대해서도 의견이 분분하다.

마의태자가 서라벌에서 금강산으로 가는 길에 지었다는 전설이 유명하다. 패망한 나라의 태자가 그만한 세력과 경제력이 있었을 리 만무한데, 미륵불인 석조여래입상이 마의태자의 여동생 덕주공주가 세운 북쪽덕주사의 마애불과 마주 보고 있다는 이야기도 내려온다.

미륵불에 더한 신라인의 바람이 아니었을까.

고려 초기 고구려의 옛 땅을 찾겠다는 신흥국가의 염원을 담았다고도 한다.

인근 마을의 고구려식지명 상모리에서 근거를 찾는다.

하지만 지세에 따라 주봉 월악산을 보고 북향으로 자리 잡았을 가능성이 높다.

정확한 의도는 기록으로 남지 않았으니 알 수 없다.

그저 중원의 운명이다.

중원은 충주의 옛 지명이다. 통일신라는 삼국을 통일하고 충주를 9주5소경의 하나인 중원경이라 했다. 고려 때 충주로 개칭했으나, 오랜 시간 중원부나 중주 등으로 같이 불렸다.

중원은 넓은 들판의 중앙이라는 의미도 있지만, 군웅이 할 거하는 격전장으로 종종 등장한다.

충주는 삼국시대에도, 통일신라를 지나 후삼국 때도 가장 첨예한 전장이었다.

무수한 사연과 이야기 또한 거기에서 기원할 것이다.

미륵대원은 사찰의 창건 시기 또한 정확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대략 고려 태조가 후삼국을 통일한 시점으로 추정한다. 미륵불을 자처한 궁예가 지었다는 설도 있으나, 고려 태조와 혼인한 충주 유 씨 집안에서 창건, 불사했다고 본다.

그렇다고 미륵불이 간직한 의미와 가치가 바뀌지는 않으리라. 미륵불은 불교의 부처 가운데 말세에 중생을 구제하러 올 것이라는, 새로운 세상에 대한 갈망을 담은 부처다.

석조여래입상 앞에는 그 증거처럼 염원이 서린 바위가 있다. 동네 할머니들이 날마다 소원을 빌었다는 바위다.

바위에 쌀알을 놓고 손바닥을 돌릴 때 쌀알이 부서지지 않으면 아들을 낳고, 쌀알이 부서지면 딸을 낳았다고 전한다.

화강암 바위의 손바닥만 한 머리 부분은 반질반질하게 닳아 윤기가 난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바람이 그 위에 더해졌을까. 빈 절터가 허전하지 않은 건, 그곳을 찾는 사람들의 마음에 끝나지 않은 바람이 담겼기 때문일 것이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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