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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사일여 생사불이
생사일여는 삶과 죽음은 둘이 아니라는 뜻으로, 삶과 죽음이 별개가 아님을 나타내는 불교의 생사관이다.
그리고 생사불이는 생사불이와 같은 뜻으로, 불생불멸 본무생사와 같은 맥락의 말이다.
생사열반상공화라,
생이 사와 다름없고 사가 생과 다름없어 생이 곧 사요,
사가 곧 생이며, 생사가 곧 둘이 아니고 하나라는 뜻이다.
의상대사 법성게에 나오는 말이다.
허지만 이런 고귀한 뜻을 모르는 중생들의 삶은 또 다르다.
어떻게 하면 생사가 없는지를 알고 생사가 둘이 아니란 사실을 알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생과 사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생과 사에 얽매이지 않을까요
이와 같이 생각하고 또 고민하거나 참구하는 것이 대부분 중생의 삶이다.
그런데 보고 생각하는 견처를 달리해서 의식해야 한다.
보는 관점, 어떻게 생각하고 인식하느냐에 따라 그 안에 생과 사가 없고, 영생이 있으며, 또한 생사가 둘이 아님에 대한, 그리고 생사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어떻게 하면 생사에 얽매이지 않을 수 있는가 하는 답이 있다.
그러나 각자가 자기 자신이라고 인식하는 몸(육체)이 자신의 전부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육체를 벗어나는 생각을 할 수 없고,
육체라는 이 몸인 나를 떠나 따로 내가 없으니 육체라는 몸의 생과 사에 얽매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제발 늙지 말라, 주름이여 펴져라, 예뻐져라, 그리하여 보약 먹고, 이것 바르고, 저것 사다가 문지르며, 좀 젊어져라, 더 늙지 마라, 이렇게 해봐야 가는 세월 막지 못하고, 오는 노쇠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어 종당에는 죽음을 앞에 두고 괴로워 하다가 모든 걸 포기하고 고통 속에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이게 중생의 솔직한 모습이고, 이런 중생에겐 육체라는 몸뚱이가 있음으로 해서 자기 자신이 있고, 육체라는 몸이 사라지면 자기 자신도 따라서 사라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육체라는 몸에 집착하고 또 육체라는 몸을 잘 유지하기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그러기 때문에 이들은 생사를 벗어날 수가 없다.
육체라는 몸을 ‘나’라고 하는 관념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겐 그 어떠한 법문을 해도 소용이 없어, 생사가 둘일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탄로가라는 시를 읊었던 고려 말의 우탁 1263~1342) 같은 이도 늙는다는 그것이 서글펐던 모양이다.
"한 손에 가시들고 또 한 손에 막대 들고
늙는 길 가시로 막고 오는 백발 막대로 치려했더니 백발이 제 먼저 알고 지름길로 오더라. "
사람은 누구나 늙게 마련이다. 늙는다는 것이 왜 서글픈 것일까.
늙음은 곧 죽음에 이르는 길목이기 때문이다.
비록 부처님께서는 일체무상 일체개고의 넓은 의미로 생사를 말하셨겠지만,
범부중생에겐 생로병사 자체가 고이고, 엄연히 생은 생이고 사는 사이다.
때문에 죽음에 대한 걱정으로 말미암아 삶을 어지럽히고, 또한 삶의 걱정으로 말미암아 죽음을 어지럽히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죽음이라는 어려운 난제를 해결하고자 하신 분이 바로 석가모니 부처님이셨다.
그러나 부처님도 끝내 죽음의 진상을 알아내지 못하셨다.
다만 죽음의 공포로부터 벗어나는 길만 터득하셨을 뿐이다.
다음은 고려 말 나옹화상의 누나가 지은 부운이라는 시이다.
생종하처래(生從何處來) 사향하처거(死向何處去)라
"올 때도 오는 곳을 모르고 왔다가 갈 때도 가는 곳을 모르고 간다. "
생야일편부운기(生也一片浮雲起) 사야일편부운멸(死也一片浮雲滅)라
"태어남은 한 조각 뜬구름 일어남이요, 죽음은 한 조각 뜬구름 사라짐이라,"
생사왕래도 다 뜬구름처럼 실체 없는 공이라 했다.
그러니 생과 사에 너무 집착하지 말라는 말이다.
불법이란 본래 늙어가는 사람을 젊어지게 하는 것이 아니고, 죽어가는 사람을 죽지 않게 하는 것도 아니다.
본래 늙음이 없고, 본래 죽음이 없는 진리를 깨달아야 하는 것이 불법의 근본 당처이다.
위의 시처럼 한 조각 뜬구름이 일어나고 사라짐과 같음을 깨달아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선종(禪宗)에서도 생사 없는 도리를 깨치라고 한다.
이러함을 무생법인(無生法忍)이라 한다.
무생법인은 불생불멸의 이치를 확실하게 인식하고 거기에 안주해 마음을 움직이지 않음을 말한다.
열반이란 본무생사(本無生死)를 증득하는 것이다.
본무생사(本無生死)란 본래부터 생사가 없다는 뜻이다.
그리하여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출현하신 것은 궁극적으로 생사문제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그러나 알고 보면 “본래 생사가 없다” 이것이 해답이다.
그러나 엄연히 우리 앞에는 생사가 있는데, 생사가 본래 없다니, 이 무슨 말인가. 납득할 수가 없다.
죽음의 문제는 아무도 모른다. 왜? 아무도 죽어본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모름지기 죽음이란 반드시 죽어봐야만 알 수 있는 법, 이 세상 어느 누구도 죽어 보지 않고서 죽음을 이러쿵저러쿵 논하는 것은 다 허황된 말일 뿐이다.
알 수 없기에 구구한 해석이 난무하는 것이다. 중생들의 생각이 이렇다.
삶은 어떠하고 죽음은 어떠하냐?
삶도 아직 제대로 다 알지 못하면서 어찌 죽음을 알랴.
어디서 왔는지 모르기에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다.
언제 왔는지 모르기에 언제 갈지도 모르겠다.
왜 왔는지 모르기에 왜 가야만 하는지도 모른다.
어떻게 왔는지 모르기에 어떻게 갈지도 모르겠다.
이게 다 ‘나’ 중심으로 생각해서 하는 말이다.
범부중생이 ‘나’라는 존재, ‘나’ 중심, 자기본위의 입장에서 하는 말이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무아(無我)를 주창하셨다.
무아란 본래 내가 없는 것이다.
내가 있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집착이고 아집이라는 것이다.
중생의 실상은 무명(無明)의 덩어리, 어리석음의 존재자이다.
그래서 결국 생사를 만들어낸다.
부처님이나 보살은 ‘내’가 없다. 무아다. 그러니 생사가 없다.
흔히 생사불이(生死不二)라 한다. 생사가 둘이 아니란 말이다.
즉, 시작과 끝이 생사이거늘, 시종(始終)을 한 점으로 연결하면 둥근 원이 된다.
그러면 무한한 세계에 생명이 나열된다.
헌데 원통이 밑에서 보면 원이지만, 정면에서 보면 사각형이다.
이 두 모양이 원통의 모습이다.
삶과 죽음은 다른 것이 아니라 원처럼 하나로 연결돼 있어서 구분할 수 없는 것이 불교의 생사관(生死觀)이다.
생과 사가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나 생(生)은 상대적 관점에서 보면 사(死)인 것이다.
밑에서 보면 생이고, 정면에서 보면 사이다.
그런데 부처님은 생사가 일여(一如) 해서 슬퍼할 것도 기뻐할 것도 없다고 하셨다.
동정(動靜)이 일여(一如) 해 젊음이란 것도 늙음이란 것도 중생의 미망에 따른 것일 뿐 진실이 아니라고 하셨다.
또한 번뇌가 곧 깨달음이고 중생이 곧 부처이며, 생사가 곧 열반이고, 생사가 일여라 하셨다.
이는 불교 존재론의 핵심인 연기론(緣起論)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세상의 모든 현상은 이치에 따라 생멸, 이합집산하면서 변화하기 때문에 삶과 죽음도 그런 궁극적인 흐름 속에서는 따로 구분할 수 없는 연속선상에 있다고 보는 것이다.
<반야심경>에서 공(空)을 불생불멸 (不生不滅), 부증불감(不增不減) 으로 설명한다.
용수(龍樹, Nagarjuna)의 저서 <중론(中論)> 속 ‘팔불(八不)’의 하나에도 나오는 ‘불생불멸’이란 말은 불교의 존재론을 천명하고 있다.
즉, 불생불멸은 태어남과 죽음, 만들어짐과 사라짐의 양극단을 부정하고, 눈으로 볼 수도 없고 손으로 만질 수도 없지만 생겨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는다는 뜻으로 불교에서 매우 중요하게 다루는 명제이다.
헌데 현상의 세계는 생자필멸 (生者必滅) 이라 했고, 나고 죽음이 뻔히 눈에 보이는데 어째서 불생불멸인가, 깨치지 않고서는 알 수 없는 불법(佛法)이라 하지만 어리석은 중생으로서는 이해하기 힘들다.
원통이 밑에서 보면 원이나 정면에서 보면 사각형이었다.
생과 사가 하나가 아니라 생은 생이고 사는 사다.
중생의 생각에서 보면, 세상의 만물은 모두 생자필멸의 원리를 따르는 듯하다.
곧, 태어난 자는 반드시 죽거나 사라지기 마련이다.
이렇듯 세상에 한번 태어난 것은 결국 죽거나 없어질 수밖에 없는데, 어째서 불생불멸이라 했을까?
그것은 우리들의 분별의식 때문이라고 한다.
태어나는 것들은 반드시 태어남과 동시에 죽음을 동반하며, 죽어가는 것들은 반드시 죽음의 마지막 순간까지 삶을 동반한다.
이와 같아서 살아간다는 것은 죽어간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즉, 우리들의 분별의식은 삶과 죽음을 따로 분리해서 서로 이질적인 다른 세계를 구축해 놓고 분별 망념의 세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탐욕이라는 근본 번뇌에 사무쳐 삶의 영화에 욕심을 부린 나머지 그 영화를 오래도록 지속시키기 위해 죽음이 싫은 것이다.
흔히 말하는 불로장생(不老長生) 이니, 불사(不死)니, ‘불멸(不滅)의 생’이니 하는 말을 하지만, 이 말들에서 생각된 영원의 생이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죽음과 대립한 생이며 참으로 죽음을 극복한 것은 아니다.
따라서 진정한 영원 ― 무한이 파악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죽음에 대립한 생에 집착한 것이어서, 생사의 줄을 끊은 생사의 극복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래서 ‘죽음에 대립하는 생’이라는 사고방식을 지양해야 진정한 영원이 포착된다는 것이다.
즉 ‘불사’가 아니라 ‘불생불멸 (不生不滅)’ 이야말로 강조돼야 한다는 것이다.
죽음에 대한 진정한 극복은 죽음과 대립관계에 있는 생의 극복이 이루어져야 비로소 가능한 까닭이다.
결국 생과 사 양자의 극복에 의해 진정한 영원이 포착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불교에서는 항상 ‘불생불멸’을 말하고 있다.
즉, 죽음과 삶은 둘이 아니요 공(空)과 색(色)이 둘이 아니라는 깊고도 묘한 뜻을 가지고 있다.
어리석은 중생의 분별심은 천국과 지옥, 생과 사, 있다 없다와 같이 세상을 둘, 또는 그 이상으로 나눠 분별하려고 한다.
이러한 잘못된 착각을 바로 잡으려 하는 인식이 바로 불이사상(不二思想) 이다.
불교의 불이사상은 이렇게 생과 사, 둘로 나누어진 개념들의 허구성에 대해서 말하고, 이러한 허구를 만들어내어서 스스로 고통 속에 뛰어드는 인간들의 무지함에 대해서 말한다.
그렇다면 마음속에 이러한 것들, ― 허구를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바로 우리의 어리석은 생각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불생불멸이라는 사실은 현대물리학에서도 일찍이 규명한 이론이다.
비눗방울 하나도 아예 없던 것을 새롭게 만들어 낼 수 없으며, 그렇게 허망하게 보이는 비눗방울도 아주 없애지 못한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어디엔가 어떤 또 다른 형태로 변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형태는 변하더라도 그 질량은 없어지지 않는다는 말이다.
예컨대, 종이가 있다고 하자, 그것을 태우면 외형은 사그라지지만 종이를 태운 에너지와 재는 완전히 없어지지 않는다.
어떤 모양으로든 우주공간에 존재하고 있다.
이와 같이 완전히 없어지지 않으니 불멸이다.
그리고 어떤 작은 물질도 새로 만들어낼 수 없으니 불생이다.
이처럼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은 연기 ― 가합(假合) 해서 잠깐 그러한 모습으로 나타났을 뿐, 종이 한 장도 완전히 없애지 못하고, 새롭게 생기게 하지도 못하는 이것이 불생불멸의 진리이다.
이것을 공이라 한다.
또한 부증불감은 불생불멸과 더불어 현대물리학의 등가원리(等價原理)에 의한 ‘질량불변의 법칙’에 비유되는 말로서, 증가와 감소를 동시에 부정한다.
이와 같이 대립되는 개념 전체를 동시에 부정함으로써 공은 새로운 차원의 철학으로 전개된다.
대립과 갈등에서 벗어나 절대평등의 세계가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드러나는 것이다.
깨닫지 못한 상태에서는 생과 사는 서로 상반되는 것이다.
그러나 깨달은 사람에게는 생과 사는 그냥 다른 이름일 뿐이다.
깨달은 분에게는 생함도 없고 멸함도 없으니 생사가 이미 없다.
그러나 깨달은 사람의 눈으로 본다면 윤회하는 중생들의 삶도 생사가 없다.
여기서 남(生)이 전생(前生)의 죽음이요, 여기서 죽음이 내생(來生)의 남이기 때문이다.
생이나 사나 변화하는 무상한 변화의 한 모습일 뿐이다.
생과 사는 분리돼 있지 않다.
생의 모습 중에 하나가 곧 사(死)이다.
깨달은 입장에서 보면, 여래(如來)는 옮아간다는 뜻이니 무엇과 같은가, 바로 감과 같아서 여거(如去)인 것이다.
즉, 오는 것과 가는 것이 같으니 오고 감이 없는 것이 여래의 참 모습이다.
그러므로 <반야심경>에서는 불생불멸이라고 했고, 부증불감이라고 한 것이다.
육신은 나고 죽는 흐름 속에 잠시도 멈추지 않고 있으니 그 참모습을 찾을 수 없음으로 찰나찰나가 곧 삶과 죽음의 연속인데, 중생들은 그 삶과 죽음의 연속을 그냥 계속 살고 있다고 착각한다.
지금 우리가 느끼는 이 순간은 방금 전에 사라져 버렸으니 이것이 죽음이요 또다시 현재를 인식하고 있으니 이것이 삶이다.
이렇게 빛보다도 빠른 속도로 변화하는 것이 바로 생과 사이다.
하지만 깨치게 되면 현상에 얽매이지 않는, 본래 움직이지 않고 오지도 않고 가지도 않는 그 본성에 머물게 되니 생사가 일여함을 깨닫는 것이다.
삶 자체가 이미 죽음을 포함하고 있다. 태아가 뱃속에 잉태되는 순간부터 죽음이 동시에 자라나고 있다.
살아가고 있지만, 살아가는 한걸음 한걸음이 사실 죽음으로 가는 길이다.
괴테는 <파우스트>에서 ‘뫼비우스의 띠’를 말한다.
‘뫼비우스의 띠’란 줄이 새끼줄처럼 180도 꼬여 있어서 한쪽에서 보면 겉인데 다른 쪽에서 보면 속으로 보이는 띠를 말한다.
삶과 죽음 역시 이러한 띠처럼 한 측면에서 보면 삶인데 다른 측면에서 보면 죽음으로 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띠는 하나다.
마치 동전의 앞뒷면처럼 동일한 물체가 앞과 뒤, 겉과 속으로 나타날 뿐이다.
우리는 매 찰나마다 생멸하고 있다. 모든 것은 일어났다 금방 사라진다.
삶과 죽음은 영원한 생명의 큰 바다에서 부침하고 있는 파도와 같다.
드넓은 바다에서 파도가 일고 스러지지만 그것 역시 바닷물의 일부일 뿐이다.
그렇게 둘은 연결돼 있다.
한 몸이나 마찬가지다.
그런데 그 한 몸이 생멸의 파도에 따라 삶으로 혹은 죽음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다만 생과 사 사이에 선(線)은 분명히 존재한다.
선과 악, 나와 너, 몸과 마음 사이에도 그 둘 사이를 구별 짓는 선은 있다.
그러나 생과 사, 선과 악을 나누는 선(線)은 동시에 생과 사, 선과 악이 만나고 통합하는 선이기도 하다.
생과 사는 그 둘 사이를 가르는 선을 통해 서로 만난다.
그래서 생과 사 사이에 선을 긋는 것은 가능하지만 생 속에서 사를 분리해 낸다는 것은 애시 당초 불가능한 일이다.
삼라만상은 연기로서 서로 연결돼 있듯이 생과 사 또한 연기 관계에 놓여 있다.
생과 사는 하나이면서도 다른 모습으로 상호 침투한다. 생이 없으면 사 또한 없는 것이다.
따라서 생과 사를 나누고 둘 사이에 경계를 짓는 것은 환상이요 착각이다.
우리의 간교한 분별의식이 지어낸 관념의 산물이다.
따라서 죽었다고 해서 죽은 게 아니요 살았다고 해서 산 것은 아니다.
삶과 죽음은 빛과 그림자처럼 그렇게 서로를 따라 다닌다.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생과 사는 서로 연결돼 있기 때문에 생과 사에 대해서 집착하지 않아야 한다.
생과 사 둘 다를 초월해야 하는 것이다.
죽음을 거부하고 삶에 집착하지 말아야 되며, 삶을 거부하고 죽음에도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
죽음을 거부하면 할수록 삶에 대한 집착이 옥죄어 들어오며 삶을 거부하면 할수록 죽음에 대한 집착이 옥죄어 들어와 고통스러운 상황이 전개된다.
따라서 육체적 생사보다 더 중요한 게 마음의 생사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언제 삶과 죽음을 초월하고 그래서 삶과 죽음이 하나가 되는 순간은 맞이하는가?
그것은 분별의식이 깨지고 경계의 벽이 무너질 때이다.
헤아리고 비교하며 출렁거리는 마음작용이 멈추어버리면 그러한 순간을 맞이할 수 있다.
중생에겐 쉽지 않지만 마음이 안정되면 생사일여의 맛을 볼 수 있는 것이다. 그걸 기대할 수밖에 없다.
허지만 아무리 그래도 중생에겐 쉽지 않다.
남길만한 정신이 있는 것도 아니고, 생사를 초월할만한 깨침이 있는 것도 아니다.
생사일여, 생사불이, 불생불멸이란 중생에겐 그림의 떡이다.
그래서 말한다.
“생사일여(生死一如) 란?
못된 사람들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가지고 장난한 것이다.
사(死)란 생(生)의 결과이며, 또한 생(生)을 원인으로 사(死)의 결과를 받는데 어찌 원인과 결과가 같다고 할 수 있겠나.”
그런데 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생사일여는, 천상계, 불국토인 신불의 세계, 밝음이 다함이 없는 세상, 불생불명한 영원한 영혼의 세계를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중생에게 생사를 초월하는 길은 수행의 공덕뿐이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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